김숭봉 선교사님의 아내 선교사님(김영선)
그런데 올 해는 참으로 이상한 날씨를 지나고 있다. 3월이면 이 곳은 뜨거운 여름이고 또 건기로 무더위를 참기가 힘든데, 이 곳에 와서 열 다섯 번째 치루는 졸업식 올 해 처음으로 비때문에 신경을 쓰게되었다. 비도 그냥 비가 아니라 장마처럼 오는 비였다. 모두 열심히 간증을 듣는 터라 혼자 우산을 쓰고 며칠 계속되던 비로 온통 미끄러운 이끼가 낀 시커먼 계단을 플래쉬로 비춰 가며 조심스럽게 집을 향해 올라 가는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자아식…. 멍청하게 그런 걸 쑤셔넣기는… 아침에 그랬으면 빨리 알렸어야지 꼭 이럴 때 까지 기다리기는… 간증이 재밌어 지는데 이거 뭐야… 계단 올라가다 미끄러져서 다치기만 해봐라… 궁시렁 궁시렁 거리며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군밤이 날라 들었다. “얘야 너 맨 날 사람들 한테 ‘우리 애들 우리 애들’ 그러지 않니? 넌 씨캅의 어머니이고 아이들은 네 자식들이라며… 자주 하는 소리 아니냐? 생각해봐라 지금 노아의 귓 속에 그런 것이 끼어서 아파하면 우산도 안쓰고 이 미끄러운 계단을 오르다 고꾸라 지는 한이있더라도 단 숨에 올라 갔다 왔을걸…” 따끔한 군밤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못된 계모 노릇하다 들킨 심정이었다. 사람들 앞에선 “아이구 내새끼” 하다가 돌아서선 아이를 쥐어 밖는 그런 계모말이다. 사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도 가끔은 쥐어 밖고 싶을 때가 있는데 하물며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들을 ‘우리 애들, 우리 애들’ 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스운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계모와 생모의 가장 큰 차이는… 아마도 해산의 고통일 것이고 그래도 내 나름데로 이 해산의 고통을 좀 치루기는 한다는 생각에 어쩌면 나는 내가 ‘우리 애들 우리 애들’ 이라고 말 할 자격이 조금은 있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난 15년 이 선교지에서 내가 치룬 해산의 고통은 무얼까
이쁘지 않을 때 그래도 사랑하고 품어주는 그 것이 해산의 고통이라는 생각이든다. 속 썩이는 미운 내 새끼를 품고 사랑해야하는 고통은 어쩌면 어미라는 본능 속에 있겠지만 내 속으로 낳지 않은 자식들이 속 썩일 때, 그냥 버리고 싶을 때, 그래도 품고 사랑 할 수있는 것은 생모의 본능보다는 계모에게는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 속에 있다는 걸 배운다. 죄에 엎어져 우리를 배반하고 곁을 떠난 녀석들을 위해 계속 눈물을 뿌리는 일은 이 계모에게 은혜없이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년 전 졸업한 녀석들 중에 한 커플이 생겼었다. 남자 애가 처음부터 참한 여자아이를 눈여겨 놓았다가 연애가 허락되는 3학년 2학기 때부터 사귀기 시작해 자연스럽게 관계가 발전해 갔다. 그런데 이 여자아이는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는 아이였다. 이유는 어려서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을 알게되어 카운셀링을 통해 치유의 과정을 지난 아이였기 때문에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하는 바램과 함께 남학생도 웬만큼 나이가 있던 착한 아이였기에 절차를 잘 잡아 결혼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졸업을 하고도 자주 불러 혼전 관계를 조심하도록 특히 여자아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했다. 그런데 졸업 후 얼마가 지나 임신소식이 들렸고 남자아이는 가장 노릇을 해야하니, 교회 사역도 관두고 가게 점원으로 취직을 했고 둘이 동거에 들어 갔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곳의 문화로는 큰 하자가 없는 일이지만 씨캅의 문화로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이런 사건은 밥 맛이 싹 떨어진다. 야! 이 자식들아 결국 그 것 밖에 안되는 느그들을 붙잡고 내가 그리 큰 힘을 뺐냐? 그렇게 화가났다가도 얼마 지나면 체념이되고 궁금해 져서 물어본다. “걔들 어떻게 됬다더냐?” 그럼 또 소식이 들어 온다. “아들 낳았데요”. 그럼 또 궁금해진다. 어떤 녀석이 나왔을까? 그렇게 맘이 돌아 서는 가장 큰 이유는 “야! 너도 가끔 내 뒷통수 치고 속 썩이지 않니? 자식은 다 그런거야” 하는 아버지의 음성때문이다.
그러다 지난 해 11월 동참모임 때 아이들 사이에서 이런 배신자들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에 대해 열띤 의견이 오고 갔고, 우리는 제 발로 찾아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아이들은 당연히 우리가 다시 씨캅의 가족으로써 받아 주겠지만, 우리가 찾아 나서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겸손을 동반 한 회개 없이 관계의 회복은 없다고 믿기때문이다. 하지만 이 들의 문화 (창피하고, 부끄러워)상 제 발로 찾아오지 못하는 것을 또 잘아는 터라 동창들에게 부탁을 하였다. nahihiya(창피하고 부끄러움) 해서 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도와 제 발로 찾아 오도록 용기를 주는 건 너희들 몫이라고… 그 말에 도전이 되었던지 한 동창생 사역자가 집에 돌아 가는 길에 앞 서 말한 두 사람에게 들린 모양이다. 따따이(아버지)와 나나이 (어머니)가 너희를 기다리니 빨리 찾아가 관계를 회복해야하지 않겠냐고…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두 사람이 연말에 젖먹이를 데리고 씨캅에 나타났다. 반가워 뛰어 나가 맞이하고 싶었지만 그럴 때 또 필요한 것이 신중한 절차였기에 참고 앉아서 두 녀석의 눈물의 회개와 고백을 다 들어 주었다. 내가 조심해라 조심해라 했을 때는 벌써 선을 넘었고, 도저히 고백 할 용기는 없었기에 이렇게 되었다고… 기도로 용서를 베풀고 데려 온 젖먹이를 우리 품 안에 안아보니 그 때서야 또 다시 해산의 고통은 사라지고 “아이구 이 예쁜 것…” 하는 고백이 절로 나왔다.
아, 귓 속에 밖힌 솜 이야기는…
소독 한 핀셋으로 조심조심 빼보려 했지만 야속한 것이 자꾸 더 기어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귓 속에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고 기다리니 물먹은 솜은 불기 시작하면서 금방 핀셋에 끌려 나왔다. 안 빠지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 제서야 풀리면서 “아이구 내 새끼 큰 일 날 뻔 했네!” 하는 소리가 이 군밤의 은혜를 입은 계모의 맘 속에서 감사와 함께 울려 나왔다.